강서경(1977–2025)은 한국 전통 회화의 정서와 조형 언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회화의 개념을 확장한 설치미술가로 기억됩니다. 그녀는 동양화의 섬세함과 전통 미학을 기반으로, 조각,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동시대적 감각을 담은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1장: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다
강서경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영국 런던의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회화를 수학하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시각을 형성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조선시대 유량악보인 정간보(井間譜)의 '우물 정(井)'자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정井' 시리즈와, 전통 궁중무용 '춘앵무'에서 사용되는 화문석을 모티프로 한 '자리' 시리즈 등에서 전통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전통과 현대, 평면과 입체, 시각과 촉각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제시합니다.
2장: 감각의 확장과 공감각적 실험
강서경의 작품은 회화의 물성을 탐구하며,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녀는 캔버스의 틀을 해체하고, 실, 금속, 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회화의 개념을 확장합니다. 또한, '모라(Mora)' 시리즈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검은 자리 꾀꼬리'와 같은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전통과 현대, 개인과 사회,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미술적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3장: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다
강서경은 암 투병 중에도 창작 활동을 지속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매일 교토의 공원과 숲을 산책하며 수집한 낙엽과 꽃잎을 이용해 고유한 색채의 회화 연작을 제작했고, 이러한 일상적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랜드마더 타워'와 같은 작품에서는 개인의 기억과 가족의 서사를 조형화하며,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했습니다. 강서경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보편적인 감정과 이야기를 담아내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전달합니다.
강서경은 2025년 4월 27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리움미술관,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등 국내외 유수의 전시에서 소개되었으며, 2018년 아트바젤 발루아즈 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예술 세계는 전통과 현대, 개인과 사회,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시대 미술에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강서경의 작품은 현재도 다양한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소장 및 전시되고 있으며, 그녀의 예술적 유산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강서경 작가님의 부고를 접했을 때, 마치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이름 세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던 작가,
그 작업의 결 하나하나가 내게 무엇보다도 섬세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웠던 작가.
이제는 그 목소리를, 몸짓을, 새로운 작업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리움미술관에서의 전시 《버들 북 꾀꼬리》를 기억합니다.
작품 앞에서 발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시간들이 선명합니다.
화문석과 천, 나무, 실, 금속… 전통과 일상의 재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회화도, 조각도, 무용도 아닌 어떤 살아있는 형식이 되던 그 순간들.
감각의 결이 겹겹이 얽히며 하나의 무형의 풍경을 만들던 그 장소.
그건 단순한 미술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온몸으로 감지하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한 예술가가 세상을 느끼고 응시하고, 해석하고, 다시 짓는 방식.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조용했고, 신중했고, 마치 오래된 산사의 나뭇결처럼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도 풍부한 정서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한국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온 작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유행에 편승하지 않았고, 언제나 묵묵히 자신만의 호흡으로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작게 반짝이는 감각의 조각들을 선물처럼 받아 들 수 있었지요.
강서경 작가님의 작업을 통해 저는 ‘화면’이라는 것이
꼭 캔버스나 벽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화폭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천을 매달고,
바람이 스치고, 빛이 흔들리게 했습니다.
그 작업들은 늘 공간과 함께 호흡했고,
때로는 무대였고, 때로는 집이었으며, 때로는 기억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떠난 이 세계 위에도 여전히
그 작업들이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작가님께서는 병마와 싸우며도 창작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을 거닐며 떨어진 꽃잎과 이파리를 채집해 고유한 색으로 물들인 작품들,
그 일상의 노동이, 생의 흔적이 예술로 변모하는 과정이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그것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가장 조용하고도 명확한 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작업을 떠올리면 마음에 평온이 깃듭니다.
그 고요한 색채와 감각의 결이,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것들을
조금 더 깊이 보고 듣게 해줍니다.
그러니 작가님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감각은, 시선은, 조형의 언어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 작업 앞에서 마음을 멈추는 순간이 있는 한,
그녀의 예술은 계속해서 호흡할 것입니다.
작가님의 삶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남겨진 조용한 울림들에, 깊이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남긴 빛과 결, 모든 것들을 오래도록 품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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