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시간의 감옥, 존재의 실험실 Tehching Hsieh

by artnlove 2025. 4. 9.
반응형

테칭 시에의 예술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묵직하고 근본적입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위로, 장식이 아니라 시간으로 예술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작업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가 예술을 통해 보여준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사소하고도 고된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응시였습니다. 그의 예술은 삶과 죽음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선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윤리학을 묻고 있습니다.

 

예술가, 시간을 견디는 자

테칭 시에(謝德慶, Tehching Hsieh)는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미술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1974년 뉴욕으로 이민을 간 이후 예술계에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초기에는 페인팅을 시도했지만 곧 예술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고민 끝에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일상과 생존, 규율, 시간이라는 보편적이고도 본질적인 요소들을 퍼포먼스를 통해 철저히 실험합니다.

그의 작업은 퍼포먼스이자 다큐멘터리이며 동시에 철학적 성찰입니다. 예술가로서의 그는 작업 속에서 완전히 자신을 던지고,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설정한 엄격한 규칙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삶의 시간성’을 증명합니다. 특히 그는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일련의 1년 퍼포먼스(One Year Performances)를 통해 세계 미술사에서 유례없는 긴 시간 단위의 퍼포먼스를 완수해 냅니다.

시에의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퍼포먼스 아트와 달리 “공연”이나 “관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작업은 관객이 없는 상황에서도 오롯이 지속되며, 작업 자체가 그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방식을 예술로 만든다.”


견디는 예술: 육체와 시간의 맨몸 대면

시에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일 년간 지속된 퍼포먼스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세 작품은 그의 철학과 예술세계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 1978–1979, One Year Performance (Cage Piece)

시에는 뉴욕의 한 방에 감옥처럼 만든 공간 안에 자신을 가두고,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TV도 책도 없이 1년을 버팁니다. 단지 식사와 사진 촬영, 생존 확인을 위해 제삼자가 방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자발적 감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오로지 육체로 감지하는 실험이었습니다.

🕰 1980–1981, One Year Performance (Time Clock Piece)

시에는 1년 동안 매시간마다 타임카드를 찍기 위해 알람에 맞춰 잠을 깨고, 자신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총 8,760시간 중 약 133시간을 제외하고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을 거스르는 이 퍼포먼스는 시간에 완전히 종속된 삶을 통해, 현대 사회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효율’과 ‘기계화된 노동’을 은유적으로 비판합니다.

🕰 1981–1982, One Year Performance (Outdoor Piece)

그는 1년 동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오직 거리에서만 생활합니다. 친구 집에서 자거나 지하철역 근처에서 쉼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했고, 극한의 불편함 속에서도 작업을 지속했습니다. 이 퍼포먼스는 도시의 익명성과 인간의 생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 모든 퍼포먼스는 기록으로 남겨졌지만,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말보다 행위를 통해 존재했고, 예술은 그가 만든 시간의 흔적 속에 남겨졌습니다.


예술, 시간의 윤리로서 존재하다

시에의 작업은 단순히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윤리적 실천이며,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입니다. 그는 육체, 시간, 공간을 기반으로 한 자기 수행(self-discipline)을 통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의 예술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무위(無爲)의 행위가 예술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미술관에 서지 않고,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으며, 쇼처럼 연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과 고립, 반복과 체념 같은 존재의 본질적인 감각들을 고스란히 감내함으로써,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이민자 정체성과 개인사적 배경에서도 깊은 맥락을 가집니다. 뉴욕으로 불법 이주한 그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생존의 연속이었고, 그의 퍼포먼스는 종종 사회적 시스템, 노동, 시간 통제라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는 2000년대 이후 ‘예술 활동을 종료했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작업은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그의 작업은, 예술이 어떤 미적 오브젝트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선언이자 실천이었습니다.

 

One Year Performance 1980–1981 (Time Clock Piece)  (1980–81)
One Year Performance 1983–1984 ( Rope Piece)  (1983–8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