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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세계의 소리, A soft Hiss of This World

by artnlove 202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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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oft Hiss of This World》는 오늘날 인류세가 불러온 위기, 즉 단순한 생태계 붕괴를 넘어 언어와 감각, 인식의 층위에서의 위기를 다루는 프로젝트입니다. 눈이 더 이상 내리지 않는 세계, 그 눈을 설명할 단어가 없는 세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던 미세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세계 속에서, 이들은 마지막 ‘쉿’의 잔향을 붙잡아 기록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조용하고 사유적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경고이며,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생태 감각의 소멸을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자연의 ‘작은 쉿소리’는 결국 인간 감각과 언어의 미세한 균열을 드러내며, 예술의 방식으로 세계의 변화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세계의 언어들 – 눈, 얼음, 그리고 이름 붙이기의 힘

《A Soft Hiss of This World》는 환경 변화와 언어의 소멸, 그리고 그것이 지닌 문화적, 감각적 의미를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작업은 눈과 얼음이라는 자연 현상을 중심으로, 그것을 인식하고 명명해 온 핀란드어의 고유 단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핀란드어에는 눈의 상태, 질감, 시간에 따른 변화 등을 세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40개 이상 존재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이러한 상태 자체가 자연에서 더 이상 관찰되지 않거나 드물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언어적 표현들도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단어의 소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Tim Ingold는 언어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세계와의 관계 맺기 방식이라고 봅니다. 눈과 얼음에 대해 세밀하게 구분하는 단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세계를 세분화하고 감지하는 능력 자체가 흐려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언어는 자연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반영하며, 이러한 감각의 쇠퇴는 곧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방식의 위축을 뜻합니다.


소리로 그리는 풍경 – 미켈 R. 니에토의 청각적 기록

사라지는 자연의 언어를, 또 하나의 감각인 소리를 통해 기록하고자 한 사람이 바로 미켈 R. 니에토(Mikel R. Nieto)이다. 그는 수백 시간에 걸쳐 핀란드의 대자연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 얼음이 깨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눈 결정의 미세한 떨림을 청음하며, 그것들을 고감도 장비를 이용해 녹음했습니다. 이 중에는 인간의 청각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극도의 섬세한 소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니에토는 이를 위해 마이크 자체를 설계하고 실험하는 과정까지 거쳤습니다.

그가 수집한 소리는 단지 음향의 기록이 아니라, 소멸 직전의 환경에 대한 청각적 초상화입니다. 눈송이가 땅에 닿을 때의 ‘부드러운 쉿(hiss)’ 소리는 이 프로젝트의 제목처럼 세계가 조용히 꺼져가는 장면을 암시합니다. 니에토는 이를 통해, 우리가 언어로 잃어버린 세계를 다른 감각을 통해 복원하려 시도합니다. 이는 단지 청각적 미학의 문제를 넘어, 예술이 어떻게 환경 감각의 아카이브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예술과 인류학, 사운드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

이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다큐멘터리 녹음이나 사운드 아트 작업을 넘어, 철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성찰을 동반한 복합 예술 프로젝트라는 데 있습니다. Tim Ingold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공존과 실천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인류학자이며, Carmen Pardo는 소리와 음악을 연구하는 비평가로서 소리의 공허함과 채움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합니다.

Carmen Pardo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사라지는 언어와 사라지는 소리의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눈의 다양한 상태가 자연에서 사라지듯, 그와 함께 들려오던 특정한 소리 또한 더 이상 감지되지 않습니다. 소리는 곧 그 존재의 징후였으며, 그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조건 자체의 상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상적인 상실감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 체계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한편 Ingold는 이러한 청각적 경험을 통해 ‘듣기’라는 행위가 어떻게 존재론적 실천이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합니다. 그는 듣는다는 것은 곧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응답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렇게 예술과 인류학, 철학, 생태적 감수성이 깊게 얽힌 협업입니다.

A soft hiss of this world ❘  Tim Ingold  &  Carmen Pardo  &  Mikel R. Nieto :book

 

A soft hiss of this world ❘  Tim Ingold  &  Carmen Pardo  &  Mikel R. Nieto : Flexi-d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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