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대지에 새긴 사유, Walter De Maria

by artnlove 2025. 4. 12.
반응형

월터 드 마리아는 조각의 개념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시간과 공간의 흐름, 존재와 비가시성의 경계에 대해 깊이 성찰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으로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울림을 남깁니다.

대지미술의 한계를 확장시킨 그는 예술을 단순한 시각적 오브제가 아닌 존재론적 경험으로 탈바꿈시켰고, 그 영향은 오늘날 설치미술, 환경예술, 체험예술 전반에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연을 매개로 예술을 사유의 장으로 끌어들인 그의 궤적은 여전히 깊은 영감을 줍니다.

사막 위에 선 빛의 숲 — The Lightning Field

1977년,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설치된 The Lightning Field는 월터 드 마리아의 대표작이자 대지미술의 상징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길이 약 1.6km, 폭 1km에 달하는 광활한 땅에 스테인리스 스틸 기둥 400개를 바둑판 형태로 배열한 설치 작업입니다. 각각의 기둥은 높이가 미묘하게 다르며, 고도에 따라 상단이 정확히 동일한 수평선을 이루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작품의 이름처럼 이 기둥들은 실제로 번개를 유도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그 결과 자연의 강력한 에너지와 인간의 조형적 질서가 만나는 드라마틱한 순간을 탄생시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단순히 전기적 현상에 의존한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드 마리아는 관람자에게 최소 하룻밤 이상 현장에서 머물며 작품을 경험하도록 권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빛, 기온, 소리, 감각은 작품의 일환이 되며,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에 인간의 존재가 조용히 동화되는 체험을 제공합니다.

그는 The Lightning Field를 통해 "조형적 최소주의와 자연 현상의 상호작용"을 제안했고, 이는 대지미술이 단지 거대한 자연 개입이 아닌 섬세한 시간적 경험임을 증명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조형물이 아닌, 관람자의 체류 시간과 감각적 반응을 예술의 일부로 포함시킨 ‘존재적 예술’로 평가받습니다.


수직과 수평의 명상 — 공간을 다루는 조형 감각

드 마리아는 초기에는 미니멀리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점차 자연과 우주적 질서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질서’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귀결됩니다. 수직과 수평, 반복과 배열, 그리고 대칭성과 비대칭성 사이에서 그는 시각적 명상에 가까운 감각을 창조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또 다른 주요 작업인 The Broken Kilometer(1979)는 뉴욕 소호의 한 갤러리 공간에 설치된 500개의 황동 막대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각각의 막대는 길이 2미터에 무게가 7.5kg이며,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총길이 1킬로미터를 형성합니다. 관람자는 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막대의 나열을 통해 마치 공간 자체가 연장되는 듯한 시각적 환영을 경험합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조각’이라는 장르를 단순한 물리적 덩어리가 아닌, 시공간 속에서의 인식의 경험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특히 드 마리아의 공간 감각은 현대 미술에서 ‘체험적 미학’이 대두되기 전 이미 그러한 방향을 선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작업은 보는 것이 아닌 ‘머무는 것’에 대한 예술로 해석됩니다.


침묵과 응시의 시간 — 예술과 초월의 경계

월터 드 마리아는 미술관이나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침묵과 응시의 시간을 관객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는 예술을 ‘보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현대 미술의 패러다임을 흔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단순한 시각적 소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깊은 인식, 그리고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자각을 요구합니다.

그는 존 케이지(John Cage)와 같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침묵우연성, 그리고 공명이라는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는 그의 예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Vertical Earth Kilometer와 같은 작업에서는 지면 아래로 삽입된 조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예술의 범위로 포함시킵니다. 이 작업은 독일 카셀의 프리드리히 광장 중심에 설치되어 있으며, 황동 막대가 지하 1킬로미터 깊이까지 박혀 있습니다. 관람자는 그중 1미터만 볼 수 있으며, 나머지 999미터는 땅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예술과 존재, 현실과 비가시성 사이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촉진합니다. 드 마리아에게 예술은 형식 이전에 철학적 질문이며, 이 질문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집니다.

 

The Lightning Field , 1977
The 2000 Sculpture, 1922

반응형